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역사/바사 왕조 (문단 편집) ====== 칼 10세 구스타브의 포위망 돌파와 바르샤바 상실 ====== 바르샤바에 머물던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6세는 칼 10세 구스타브가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스웨덴군 2,500명을 이끌고 나섰다. 이에 따라 칼 10세 구스타브를 포위하던 폴란드군 일부가 프리드리히 6세를 상대하기 위해 이탈했기 때문에 칼 10세 구스타브는 스스로의 힘으로 포위망을 돌파하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6세에게는 바르샤바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비록 프리드리히 6세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에게 추격을 당하여 4월 7일 '바르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그가 시간을 버는 사이 칼 10세 구스타브는 무사히 포위망을 돌파하여 4월 13일 바르샤바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감을 회복한 얀 2세 카지미에시가 AD 1656년 4월 1일 '르부프 서약(Śluby lwowskie)'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를 폴란드의 여왕으로 선포하며 폴란드인을 종교적으로 결속시켰다. 그리고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대(大) 폴란드 지방의 탈환에 나섰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칼 10세 구스타브가 바르샤바를 떠나자 4월 21일 루블린의 탈환에 성공한 파베우 얀 사피에하의 리투아니아 군이 4월 23일 바르샤바 근처의 프라가에 도착하여 바르샤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도 5월 7일 '크웨츠코 전투'에서는 패배했으나 [[그니에즈노]]에서 병력을 재편한 뒤 5월말 파베우 얀 사피에하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의 바르샤바 포위전에 합류했다. 이에 바르샤바의 수비를 맡던 아르비드 비텐베르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6월 1일 바르샤바를 포기하고 탈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